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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르] 시지프스 유니버스

할아베지 @1103X1230

가능한 한 무심해지기.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대답은 한 박자씩 늦게 하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면 눈을 마주치기 전에 발치부터 확인하기. 시선은 가능한 바닥이나 벽에 두기. 헛것을 본다는 소문이 나는 것보단 멍하고 무신경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기억하기. 철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학교 운동장 한구석의 개수대에 얼굴을 처박고 울면서 다시는 죽은 것들과 말을 섞지 않기로 다짐했다. 모래 섞인 바람이 자꾸만 뒷목을 때렸다. 등 뒤로 노을이 졌고 머리 위에서 졸졸졸 물이 흘렀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가 낯설었다. 낯설고 두려웠다. 그게 오 년 전. 열한 살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길 잃은 영혼에게 관심을 주는 건 위험한 일이고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경계를 푸는 건 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기억하기. 그 진리를 깨닫고 나서야 성장통이 찾아왔다. 통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었다.

 

 

*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다른 놈들이랑 비슷한 귀신이구나 했다.

 

두 번 세 번을 마주친 뒤에야 입은 옷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세상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떠다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면 패션이 특이한 귀신 하나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기 마련이었다. 군인이었던 걸까. 역사책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옷인데. 총이라도 맞아 죽었나. 그 정도 생각뿐이었다 그때도.

 

제대로 그를 기억하게 된 건 얼마 뒤였는데 애초에 그 번들번들하고 험상궂은 얼굴을 매일 마주하면 잊기 힘들긴 했겠다. 아무튼 악몽인지 뭔지, 아무리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 벽을 향해 끝없이 달리는 꿈을 꾸다가 쉬는 시간 종소리에 고갤 들었더니 그 얼굴이 대뜸 눈앞에 있었다.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아닌 척했다. 애써 티 안 나게 시선을 피하면서 또 뭐야, 진짜, 지겨워 죽겠네, 같은 생각을 했다. 왜 날 보고 있는 거지. 설마 보인다는 걸 들킨 걸까. 아니 애초에 보고 있다는 말이 적절한가? 관찰 내지는 주시가 더 어울리지 않나? 뚫어져라 쳐다본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겠다는 듯 얼굴을 들이민 꼴에 스트레스가 왕왕 몰려왔다.

 

달가운 체질은 아니었다.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영혼들이란 대개 편히 죽지 못한 것들이라 끔찍한 외양을 하고 있었다. 가슴팍에 칼을 꽂은 채 돌아다니는 놈은 흔하다 못해 귀여울 지경이었다. 뭉개진 얼굴로 차도를 배회하거나 잘린 팔다리와 머리를 쫓아 뛰어다니는 몸통 같은 것, 갈라진 배에서 내용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다니는 놈들을 보고 자란 게 정서에 좋은 영향을 끼쳤을 리 없었다. 내가 보이는 거지? 나 좀 도와줘. 내 말 좀 들어줘. 지긋지긋한 일투성이인 세상에서, 베르톨트 후버는 소극적이고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입을 다무는 게 습관이 됐다.

 

16년을 살면서 죽은 사람의 혼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많이 봤지만, 그 남자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간 체득한 귀신들의 행동 패턴에 의하면 ① 겁을 먹거나 보이는 티를 내지 않으면 살아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 ② 생전의 한이 있거나 ①의 경우가 아니라면 이유 없이 한 사람을 따라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베르톨트의 뒤를 쫓아다녔다.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는 하굣길에도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따돌리려고 해봐도 느지막한 속도로 현관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될 뿐이었다. 살짝 밀려나온 책상 의자에 앉아 밤새도록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신경 쓰느라 한숨도 못 잔 이후로, 베르톨트는 그가 제게 용건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대체 왜? 애초에 누구길래?

 

제가 보인다는 걸 알지 못하는 듯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거나 나란히 앉아 쳐다보는 정도가 전부니까 ①의 경우는 아닐 텐데, 원한이 있다고 생각하기엔 베르톨트에게 그는 완전히 초면이었다. 누굴 닮은 것 같은데, 혹은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하는 기시감마저 들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만난 적 없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푹 꺼진 뺨과 눈가, 부스스한 금발, 정리되지 않은 수염 같은 것들이 강렬했음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귀신이 보인다고 해서 직감이 좋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 남자가 왜 자신을 쫓아다니는 건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 외에도 그가 유별나게 느껴졌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하얀 제복 아래에 피가 비친다든지 다리 한쪽이 절단되어 피를 흘리고 다닌다든지, 머리가 반쯤 날아갔다든지 하는 외상이 눈에 띄지 않는 점. 독살당한 건가? 하지만 안색이 파랗지 않은데. 만약 자연사한 거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제 주변을 배회하는 것이 더더욱 이상했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사람을 아무리 나열해 봐도 그사이에 그는 없었다.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한 맺힐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기억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남자는 언제나 슬퍼 보였고 베르톨트는 그게 신경 쓰였다. 죽은 사람에게 마음을 두는 일은 열한 살 때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철칙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어쩐지 그에게만 예외를 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무심코 생각했다가, 제 무의식에 놀라 뺨을 철썩 때렸다. 미쳤어.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끔찍한 상상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았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야. 아니 애초에 이미 죽었으니 사람도 아니지. 방심하면 금세 물렁해지려는 가슴 한편을 손으로 잡고 흘러내리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 길 잃은 영혼에게 관심을 주는 건 위험한 일. 잊어서는 안 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보지 않은 병원이 없었고 받아보지 않은 치료가 없었다. 상담사를 얼마나 많이 갈아치웠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논 기억은 거의 없었다.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대개 두려워 하거나, 역으로 위협당하거나, 소외당할 뿐이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동네 전체를 돌았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길을 걷다 마주친 어른들조차도 수군거리며 피해갔다. 집을 몇 번이고 옮겼던 게 그 때문이었다는 건 조금 더 머리가 커진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보이는 걸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법을 몰랐다. 처음에는 그랬다. 저 아저씨는 누구예요? 왜 저기 앉아 있어요? 저 누나는 왜 피를 흘리고 있어요? 누가 도와줘야 하지 않아요? 여긴 병원이잖아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선생님한테 이야기해줄래, 베르톨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성심성의껏 대답했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환청을 듣는다든지 환각을 본다든지. 조현병이 의심된다든지. 아버지는 언제나 진단을 부정하려고 했고 새로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전국의 모든 정신과를 돌아다닐 것처럼 굴었다. 어머니는 아들 본인보다는 주변의 시선을 더 의식했고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때까지 전국의 모든 집으로 이사를 다닐 것처럼 굴었다. 베르톨트는 그게 지겨웠다. 모든 게 지겨웠다. 지겹다 못해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그냥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모든 게 괜찮아졌다.

 

저기 구석에서 절단된 팔의 단면을 붙잡고 있는 사람도, 엄마를 찾으며 횡단보도 주변을 쉴 새 없이 배회하는 어린아이도, 귀를 막고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노인도 정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평범하다는 게 이렇게 별거 아닌 일이었다니. 나만 입을 다물면 전부 괜찮아지는 문제였다니. 베르톨트는 기쁘면서도 조금 허탈했다. 나는 남은 인생 내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척하며 살아가겠구나. 그 사실이 너무 뻔해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때의 베르톨트는 고작 여덟 살 즈음이었고, 이후의 3년이 예상 그대로 흘러갔다.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돌거나 상담이 필요하다는 진단도 받지 않았다. 정말로 평범한 아이가 된 것만 같았다.

 

그 남자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 시절이 떠올랐다. 평범해지는 일에 막 적응하기 시작했던 시절이. 철칙을 세우기 시작했던 시절이. 가능한 한 무심해지기.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대답은 한 박자씩 늦게 하기.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면 눈을 마주치기 전에 발치부터 확인하기. 시선은 가능한 바닥이나 벽에 두기. 헛것을 본다는 소문이 나는 것보단 멍하고 무신경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훨씬 낫다는 것을 기억하기. 철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도. 베르톨트는 그렇게 조금 둔하고 느리지만 이상하지는 않은 아이가 됐다.

 

억울한 죽음은 세상에 차고 넘칠 만큼 많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어린아이 하나가 그 모든 걸 책임져줄 이유는 없었다. 베르톨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보인다는 걸 알아차리면 달라붙어 올 혼들이 너무 많았다.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든지 복수를 도와달라든지. 도망치는 기분으로 모든 걸 무시하며 살았다. 사실 도망친 것도 아니었지만.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죄책감은 어디에서 온 건지, 베르톨트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쫓아다녀도 난 그쪽을 도와줄 수 없어요.

 

말을 걸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지만 그만두었다. 보인다는 걸 먼저 말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베르톨트의 주변을 맴돌았다. 슬프고 피로한 얼굴로. 가끔은 정말 울기도 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저 말을 들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겠지만. 그걸 본의 아니게 지켜보다 보면 궁금해지기도 했다. 누구에게 사과하고 싶은 건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슬퍼하는 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어떤 복잡한 관계가 있길래 죽어서도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생판 남인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하지만 아무것도 물어서는 안 된다. 길 잃은 영혼에게 관심을 주는 건 위험한 일이고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경계를 푸는 건 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기억하기.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마지막 철칙. 잔뜩 움츠러든 남자의 어깨를, 그 뒷모습을 몰래 바라보면서 베르톨트는 되뇌었다. 그것만큼은 결코 어겨선 안 된다고. 저건 사람이 아니라고, 존재하는 세상 자체가 다르다고. 관여해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고. 동정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으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생전에 관계도 없던 사람이니 계속 무시하다 보면 언젠간 떠날 것이었다. 그렇게 믿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나쁜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나 너 알아. 귀신 보는 애잖아.

 

걔는 유난히 제멋대로였고 좀 싸가지가 없었다. 문제아는 아닌데 재수가 없고. 눈치가 없는 건 아닌데 굳이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도 않는 놈. 베르톨트는 걔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게 조금 짜증 나고 얄미웠다. 그런 여유란 남들과 같은 궤적을 따라가는, 애쓰지 않아도 평범함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라고 베르톨트는 믿었다.

 

베르톨트 맞지?

……난 너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맞네. 너 유명했잖아, 온 동네가 다 알았는데. 귀신 보는 애가 있다고.

 

걜 만났던 일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라도 그런 일은 일어났을 테니까. 세상은 열한 살의 베르톨트 후버가 생각하는 것보다 잔혹했고 궤적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단순한 거짓말은 언제든 들통 나고 만다. 상대가 K가 아니었더라도 몇 년, 어쩌면 몇 달 아니 며칠 내로 K와는 다른 이름의 고비가 찾아왔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불행이 주어지고 회피하려 해봤자 결국 돌아온다는 게 베르톨트의 생각이었다. K는 그 일환일 뿐이었으리라.

 

걔는 자기를 K라고 소개하고선 후버 가족이 고작 반년을 머물렀던 동네의 이름을 꺼냈다. 그곳에서 살았던 기억은 있었지만 K와는 이름도 얼굴도 초면이었다. 대놓고 손가락질하거나 따돌린 놈 중 하나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선의를 기반으로 한 일은 아닐 거라고 베르톨트는 생각했다. 무슨 꿍꿍이지. 어차피 지금에야 그런 이야기가 돌아봤자 믿을 사람도 없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게 벌써 3년 전이었다. 그동안 그걸 다시 들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K는 생각보다 단순한 인간이었고 베르톨트는 생각이 너무 많은 편이었다. 그게 모든 일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그냥 얌전히 K의 부탁을 들어줬더라면. 지레 겁먹고 피하지 않았다면? 또 다른 요구를 해왔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베르톨트는 자주 그런 가정을 했다.

 

걔는 죽은 누나와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죽었대.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실로 단순하고 명료한 욕망이라서 오히려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느껴졌다.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건지. 공감도 이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베르톨트는 K가 자신이 정말 귀신을 보는 건지 궁금해서 이상한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제멋대로인 데다가 싸가지도 재수도 없고. 눈치가 없는 건 아닌데 굳이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는 않는. K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없던 일 같았다. 아는 척을 한 이후로 K는 매일매일 베르톨트를 졸졸 쫓아다녔다. 같은 반도 아니면서 그러는 게 K에게는 쉬운 일 같았다. 어울려 다니던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는 급식을 같이 먹자며 태연자약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진짜 내 부탁 안 들어줄 거야? 듣는 귀 많은 곳에서 자꾸만 그 이야길 꺼내려고 해서 다급히 화제를 돌리고 눈치를 준 게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냥 한 번 만나게 해주면 안 돼?

그러니까 난 귀신인지 뭔지, 그런 거 못 본대도.

그럼 왜 그렇게 다른 애들 앞에서 얘기도 못 꺼내게 해?

…….

정말 못 보는 거면 그냥 무시했겠지. 너 거짓말 되게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꼭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가끔은 정말로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 누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었기에 K가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건지. 나이 차는 얼마나 나고 어쩌다 죽은 건지. 하지만 그런 것들을 묻기 시작하면 결국 K의 부탁을 들어줘야만 하게 될 테지. 그런 건 싫었다. 어차피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은 사람이라고 명명하기에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집에가고싶어너무아파나좀도와줘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제 몸이 토막 난 사거리를 영영 돌아다닌다든지. 돌담에 박히지도 않는 머리를 계속 내리찧으며 딱따구리 같은 소리를 낸다든지. 그런 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K의 누나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면 분명 멀쩡한 꼴은 아닐 텐데. 그런 것들과 비슷한 꼴이 됐을 모습을 K에게 설명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일은 괴로웠다. 베르톨트 후버는 소극적이고 예민한 소년으로 자라났지만 타인에게 정을 주지 않는 법은 익히지 못했다. 목적이 있는 접근이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부터 K는 베르톨트의 친구였다. 베르톨트 또한 K에게 친구였을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지난 일을 의심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불행이 주어지고 회피하려 해봤자 결국 돌아온다는 것.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K가 없었더라도 베르톨트는 다른 누군가에게 정을 주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일정한 양의 불행을 선사하고 떠났을 것이고.

 

너한테는 쉬운 일이면서.

…….

베르톨트. 내가 싫어서 그러는 거야?

K, 아냐.

그럼? 내가 쩔쩔매는 걸 보면서 우월감이라도 느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슬픔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베르톨트는 다급하게 잠에서 깨어났다. 한동안 안 꿨던 꿈이었는데. K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창밖은 아직 캄캄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마른세수를 연거푸 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여전히 곁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침대를 등진 채였다. 자다 깬 베르톨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무언가를 고심하는 것 같았다. 나쁜 꿈을 꾸고 일어나서 그런지 갑자기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나한테 주어진 불행만 이렇게 가혹한 거지? 이 남자도 K처럼 내게 주어진 불행의 일환인 걸까. 평생 나를 쫓아다닐 생각인 걸까. 죽은 사람과 엮이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닿지도 않을 남자의 등에 주먹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다.

 

시도하지도 못할 걸 알면서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쥐고 있던 이불 끝자락이 굵은 주름을 남기며 구겨졌다. 어째서 이렇게 감정을 조절하기 힘든 걸까. 도무지 정이라고는 들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억세 보이는 노란 머리카락, 희고 거칠한 피부와 굵은 뼈대 같은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말린 어깨와 하얀색 군복도. 무언가가 자꾸만 가슴 안쪽에서부터 툭툭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인지 원망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감이 오질 않아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럴 순 없어서 대신 베르톨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깊게. 사색에 잠겨있던 남자가 알아차리고 뒤돌아볼 정도로.

 

눈이 마주쳤다는 걸 인지한 건 몇 초가 흐른 뒤였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반응속도가 느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 때문이었겠지. 비몽사몽 한 중에 가슴이 이상하게 끓어올라서였겠지.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생각보다 눈매가 그렇게 날카롭진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발뺌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하게 시선이 맞부딪쳤다.

 

……라이너?

 

자각할 틈도 없이 입술 새로 이름이 튀어나왔다. 자신의 입으로 처음 듣는 이름을, 마치 본능처럼. 남자의 동공이 커지는 게 보였다. 제 목소리에 제가 더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것도 못 본 척 뒤돌아 눕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어딘가로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상대는 유령이고 여기는 침실이고 시간은 아직 동트기 전이고. 아무튼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좆됐다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베르톨트?

 

시야가 훅 천장으로 뒤집혔다. 등을 뒤쪽으로 슬슬 빼다가 침대 뒤쪽으로 그만 떨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바닥에 처박은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베르톨트!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눈앞이 점멸했다. 나 지금 기절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까만 점이 밀려 들어오면서 의식이 나가는 그 순간에, 남자가 붙잡아도 흔들리지 않을 제 어깨에 손을 얹는 모습이 보였다. 나한테 대체 무슨 용건이 있는 걸까. 내 이름은 왜 알고 있는 걸까. 어차피 들킨 거 깨어나면 그것부터 물어야겠다고, 태평한 생각이나 하며 의식을 잃었다.

 

 

*

 

 

아니야, 난…… 난 우월감 같은 거 안 느꼈어.

그럼 만나게 해줘.

K.

볼 수 있잖아.

……K.

누나랑 만나고 싶어.

 

K는 베르톨트가 오기 전에도, 이사를 간 이후에도 줄곧 그 동네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누나는 거기에서 죽었대. 교차로를 걸어가다가 트럭이랑 부딪쳐서. 생각해보면 위화감이 들 법도 했는데. 베르톨트는 죄책감을 이겨내는데 신경이 쏠려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사고를 K는 왜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건지. 부모님이 알려줬을 리도 없는 일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건지. 왜 귀신을 보는 애가 있다는 소문이 돌 때, 베르톨트와 K가 같은 곳에 살 때 먼저 찾아오지 않은 건지.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회상했을 때 위화감을 느낄 수 있는 거겠지. 베르톨트는 이제 무의미한 가정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모든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K의 누나는 K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트럭에 치이기 직전의 K가 본능적으로 누나의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대신 죽었다는 것도. 오히려 미리 알았더라면 더더욱 K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그런 생각은 다짐과는 별개로 성글게 일어난다.

 

열한 살의 베르톨트는 K를 옆에 두고 그 교차로 앞에 서 있었다. K와 똑같은 눈매를 한 어린 여자아이를 봤다. 반쯤 깨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그걸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았을까. 아직도 답을 알 수 없었다.

 

K는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면서. 왜 네가 미안해? 돌아오지 않는 K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미안하대요. 이제는 나이를 먹지 않는 얼굴로 K의 누나가 고개를 들어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죽은 것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게 몇 년 만인지 몰랐다.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서 턱짓으로 K를 가리켰다. K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베르톨트가 말을 건넨 쪽의 허공을 애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안 났다.

파편처럼 흩어진 말의 조각을 전부 주워담을 정도로 오지랖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K에게 좋은 일이 아닐 거라는 건 본능적으로 느꼈다. 우습게도 그 꼴을 보고서야 겨우, K 또한 남들과 같은 궤적을 걷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그간 동경하던 평범함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했다 하필이면 그 순간에.

 

너 때문이잖아 개새끼야 죽여 버릴 거야 끝까지 쫓아갈 거야 너 때문에 죽었어 너 때문에 영원히 널 저주할 거야 하고 K와 똑같은 눈이 울기 시작했다. K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얼굴로 베르톨트가 전해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지. 이런 게 싫어서 전부 그만뒀던 거였지. 뭐래? 누나가 나한테 뭐라고 말했어? 응? 어깰 붙잡고 흔드는 K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저주의 음성과 닮아있어서. 베르톨트는 혼란스러웠다. 핑계를 대자면 그랬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그랬다. 들리는 말 혀에 붙잡히는 대로 죄 내뱉었다. K의 표정이 차마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을 즈음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지. 고통스러운 기억은 흐트러지고 뭉개지고 왜곡된다. 베르톨트의 것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K는 더이상 베르톨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모든 게 없던 일인 것 같았다. 둔한 척하지만 사실은 존나 소름 끼치고 오싹한 새끼라고 뒷말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거, 그게 누구 소행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귀신을 본다는 거. 남을 저주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거. 그런 이야기가 돌아도 베르톨트는 애써 K를 생각하지 않았다. K를 기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려고 했다.

 

모방한 평범함으로 겨우 곁에 두었던 친구들마저, 깨달을 즈음에는 전부 멀어져 있었다. 거짓말을 시작하기 전에는 언제나 혼자였으므로. 외로움 같은 건 느낄 줄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애초부터 없던 것과 있다가 없어진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는 걸 처음 알았다. 교차로를 지나다니는 게 두려워졌다. 악몽에 자주 시달렸다. K의 얼굴이 나왔고 K와 똑같은 눈매를 한 K의 누나가 나왔다. 홀로 하교하다 보면 환청처럼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아이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학교 운동장의 인적 드문 구석에 쭈그려 앉아 시간을 죽였다. 가끔 너무 죽어버리고 싶을 때면 모래 쌓인 개수대에 물을 틀어두고 울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 걸까. 개수대에 얼굴을 처박고 울면서 다시는 죽은 것들과 말을 섞지 않기로 다짐했다. 모래 섞인 바람이 자꾸만 뒷목을 때렸다. 등 뒤로 노을이 졌고 머리 위에서 졸졸졸 물이 흘렀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가 낯설었다. 낯설고 두려웠다. 그게 오 년 전. 열한 살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길 잃은 영혼에게 관심을 주는 건 위험한 일이고 살아있는 사람 앞에서 경계를 푸는 건 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걸 기억하기. 그 진리를 깨닫고 나서야 성장통이 찾아왔다. 통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었다.

 

 

*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라이너 브라운이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를 하는데 자꾸만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서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른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 그런데도 입을 열지 않는 귀신은 난생처음이었다. 대신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대체 나한테 뭐가 미안한 건데요? 물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다 그 낯선 이름이 제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지는 베르톨트도 알지 못했다. 기억하는 거냐는 말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죽은 사람과 엮이는 건 이제 관두기로 했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그런 마음이 얼굴에서 티가 났는지 남자는, 그러니까 라이너는 반쯤 체념한 것 같았다. 애초에 무언갈 바라고 접근한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보인다는 걸 들키면 태도가 돌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이너는 줄곧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잊을만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넬 뿐이었다.

 

나한테 그러지 말고 사과할 사람을 찾아가지 그래요.

…….

내가 들을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다, 베르톨트…… 너한테 해야 하는 말이 맞아.

난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그 이상으로 대화가 진전되지는 않았다. 골 때리는 인간, 아니 귀신이구나 생각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물으려고 하면 얼굴에 짙게 그림자가 졌다. 하여튼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누가 보면 자기 때문에 내가 죽은 줄 알겠어. 베르톨트는 한숨을 쉬며 라이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시선을 들키면 안 된다는 이유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없었던 얼굴. 뜯어보면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닌 듯했다. 일찍 죽었나. 불치병이라도 걸렸던 걸까. 그런 사소한 예상들을 다 접어두더라도 역시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베르톨트는 남자가, 라이너 브라운이 궁금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K에 대한 꿈을 꾸면서도, 정신 못 차렸구나 싶으면서도 궁금했다. 처음엔 좀 짜증 났고 답답했고 등짝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는데.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건지 듣고 싶어졌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보인다는 걸 들킨 이후로는 학교까지 따라오지도 않았는데 그게 은근히 아쉬웠다. 자각했을 땐 내가 미쳤지 하고 책상에 머리를 꽝 박았다. 잊으면 안 돼, 베르톨트. 죽은 사람이랑 엮여서 좋을 거 없다니까. 하지만 어쩐지 라이너는 다를 것 같았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할 것 같았다. 험상궂고 우락부락한 외양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온 걸까, 출처 모를 감정은. 외로워서 죽어버릴 것 같다는 게 뭔지 처음으로 깨달았던 때가 떠올랐다. 라이너는 줄곧 나를 바라보면서 외로웠을까. 닿지 않을 사과를 중얼거리는 내내. 운동장 구석의 개수대에 머릴 처박고 울던 열한 살의 베르톨트가 라이너와 겹쳐 보였다. 이상한 동정심 같은 거 품어봤자 쓸데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가다듬기가 어려웠다.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예요?

 

몇 번이고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제멋대로 상상했다. 전생이니 뭐니 하는 것들. 죽은 사람도 보는 주제에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던 것들. 라이너는 입 밖으로 내기조차 두려운 잘못을 내게 저지른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마음을 어지럽혔다.

 

……미안하다, 베르톨트.

 

라이너는 사과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대신 침대맡에 앉아 사과만 연거푸 중얼거렸다. 잠든 줄 알고 건넨 말이 베르톨트의 귀에 흘러들어 간 것도 몇 번이나 되었다. 라이너는 어떤 궤적을 따라 걷다가 그곳을 이탈해 나를 찾아온 걸까. 듣지 못한 척 뒤척이며 베르톨트는 새카만 시야 위로 라이너의 얼굴을 덧그렸다. 보인다는 걸 들킨 이후로 고작 며칠간 마주한 얼굴인데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쩌면 영원히 뇌리에 박힌 채 저주처럼 자리할 거라고 믿었던 K와 그의 누나보다도 더. 정말로 전생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어보고 싶어질 만큼.

 

뜻 모를 사과를 한 번이라도 받아주는 게 좋았을까. 이유도 모른 채 받아들이는 건 기만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무의미한 가정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여전했지만 어떤 후회는 다짐과는 별개로 성글게 일어난다. 몇 번째인지 세어보는 것도 포기한 사과를 듣고 까무룩 잠든 그 날, 라이너 브라운은 사라졌다.

 

 

*

 

 

K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전생이라든지 환생 같은 걸 믿느냐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누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꺼낸 이야기였겠지. 당시에는 귀신을 본다는 이야기와 연관 지어 떠보려는 속셈인 줄로만 알고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난다. 베르톨트, 난 신 같은 건 안 믿지만, 전생은 진짜 있을 것 같아. K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치?

왜?

그럼 다음 생에 내가 누나를 만나러 갈 수 있잖아.

…….

그럴 수만 있다면 너한테 누나랑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일도 없었겠지.

K, 난 귀신같은 거 못 본다니까.

그래, 그래. 말을 너무 미리 끊어버리는 거 아냐? 그냥 그거랑 별개로 말이야.

 

이상하게 그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생이니 뭐니 하는 건 믿지 않았지만. 애초에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삶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을까? 베르톨트는 K가 다음 생에 누나의 존재를 기억하더라도 정말 누나를 찾아가게 될지 궁금했다. 그래 봤자 다음 생의 K는 지금 내가 아는 K와는 전혀 다른 사람일 텐데. 전생에 먼저 죽은 누나라고 해봤자 전혀 모르는 사람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전생 같은 건 아무런 의미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생판 다른 사람의 삶이나 마찬가지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역시 단 한 번이라도 사과를 받아주는 게 좋았을까. 베르톨트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곁에 라이너가 없다는 걸 가장 먼저 깨달았다. 보인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지박령처럼 베르톨트의 방에만 머물렀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귀신이 어떻게 흔적 같은 걸 남기고 다니겠어. 살아있는 사람과는 달리 귀신은 발자국도 머리카락도 지문도 남기지 않는다.

 

비척비척 일어나 집안 곳곳을 뒤져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라이너 브라운은 사라졌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사과만 전하다가 사라져버렸다. 후련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그렇지 않았다. 이제 다시 남들처럼 궤적의 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의 어느 부위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사과하는 이유를 듣지 못해서? 끝까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서? 이건 단순한 호기심일 뿐인 걸까?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생판 다른 사람의 삶이나 마찬가지겠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베르톨트는 교복 넥타이를 매다 말고 손을 멈췄다. 뒤를 돌아봐도 여전히 라이너는 없었다. 전생에 먼저 죽은 누나라고 해봤자 전혀 모르는 사람일 텐데. K는 정말로 다음 생에 누나를 찾아가 사과를 전하게 될까? 라이너가 언제나 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던 침대맡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있는 사람이 머물렀더라면 온기가 남아있을 그 자리를. 베르톨트는 잰걸음으로 다가가 라이너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던 곳에 발을 대 보았다. 당연하게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일은 지독하게 아이러니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만 그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베르톨트는 그 사실을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알았다. 단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딘 것은 아니지.

라이너의 자리에 발을 딛고 선 순간 모든 기억이 밀려 들어왔다.

 

맨발바닥에 닿는 바닥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일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고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베르톨트는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졌다. 16년 어치의 기억이 전부. 전사 후보생에 합격하던 순간도. 초대형을 계승 받던 순간도. 라이너와 함께 파라디에 도착했던 순간도. 월 마리아를 무너뜨리던 순간도. 조사병단에 들어가던 순간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뭉개졌던 양 뺨이 오싹하게 아파왔다.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 얼굴을. 어떻게 기시감조차 느끼지 못했던 걸까. 그 이름을.

 

라이너. 자각할 틈도 없이 입술 새로 튀어나왔던 그 이름이 무슨 의미였는지.

왜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베르톨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듬더듬 라이너의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라이너. 라이너가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라이너 브라운이. 눈앞에 있었는데도 알아보지 못했구나 나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머릴 쥐어뜯으며 걸음을 옮겼다. 매다 만 교복 넥타이라든지 바지에서 반쯤 빠져나온 셔츠 밑단이라든지 그런 건 상관없었다. 라이너. 베르톨트 후버는 라이너 브라운을 기억할 수 있었다. 라이너가 어떤 궤적을 따라 걷다가 그곳을 이탈해 자신을 찾아온 건지도. 전부 알 수 있었다.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육체가 감정을 쫓아가지 못해서 자꾸만 오류가 났다. 이상하게 웃음이 터졌다. 양 뺨이 눈물로 젖어드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라이너. 라이너.

 

거기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살아있는 사람과는 달리 귀신은 발자국도 머리카락도 지문도 남기지 않는다. 라이너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딘가로. 어쩌면 베르톨트는 닿을 수도 없을 곳으로. 영원히 찾아 헤맨다고 해서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곳으로. 시야가 눈물로 부예졌다가 말았다. 라이너 브라운은 사라졌다. 받아주지도 못한 사과만을 남기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목소리만을 남기고. 기억만을 남기고.

 

마치 베르톨트 후버가 그랬듯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꼭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라디도 마레도, 전사대도 조사병단도 이제는 없다. 그 세계가 어떤 시간 선에 존재했던 건지도 알 수 없다. 라이너가 어디에서 어떻게 죽은 건지도 알 수 없다. 베르톨트 후버의 기억은 거기까지 닿지 못한다. 하지만 찾을 수 있다. 만났으니까. 어젯밤까지 함께 있었으니까.

 

라이너, 네가 먼저 나를 찾아와줬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널 찾을 수 있을 거야. 미친 사람처럼 자꾸만 웃음이 났다. 구겨 신은 신발 뒤축 때문에 걸음이 절뚝거렸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발걸음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건지도 알지 못하면서,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히 알았다. 라이너. 네가 있는 곳으로. 어떤 시간 선으로 가버린 건지, 어디에서 어떻게 죽은 건지도 알 수 없지만. 네가 나를 먼저 찾아와줬으니까. 어디로 가버린 건지 알지 못하는 나를 찾아와줬으니까.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세계까지 기어코 와줬으니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곁에 머물러줬으니까. 이제 내가 그 불확실성에 기댈 차례겠지.

 

어쩌면 영원히 이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게 라이너, 너를 좇는 굴레라면.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무한한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내가 너를 찾고 네가 나를 찾아준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K. 네가 다음 생에도 누나를 기억하고 싶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매몰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파헤쳐지기를 기다린다.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 숨죽인 채로. 베르톨트는 이제 흙투성이가 된 기억을 품에 안고 궤적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라이너. 궤적의 가운데에서 다시 만나면

사과 대신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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