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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르] 착란

​고어 @ gootakure

아르민이 내어준 커피는 조금 진했다. 그러잖아도 매일 밤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다른 음료는 없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떠냐고 했다. 정신상담. 조금 생소한 단어였다. 어딘가의 높으신 분이 먼저 말을 꺼낸 모양으로, 그뿐만 아니라 아르민과 애니, 가비… 땅울림을 막을 때 함께했던 모두에게 권해진 거라고 했다. 실제로 그들의 대부분이 수면 장애를 비롯한 이런저런 문제들을 떠안고 있었으니 꽤 사려 깊은 제안이었다.  


"상담은 내가 진행할 거야. 전문적이지는 않겠지만 기밀 문제도 있다 보니… 그래도 분석은 전문가가 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아. 오히려 아는 사람이라서 편한걸."  


통보된 시간에 맞춰 상담 장소에 나가자 아르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파라디 섬으로 돌아갈 수는 없게 된 아르민은 마레에 머무르며 파라디 섬 바깥의 에르디아인들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의 상담을 맡게 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음… 우선 네 이야기를 해볼래? 어렸을 때의 일부터 차례대로 되짚어보는 거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익숙지 않았기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군에 자원했을 때의 일? 아니면 마레인 아버지부터일까. 그보다 더 전의 이야기부터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어 두서없는 말을 더듬더듬 주워섬겼다.  


"…베르톨트와는 그때부터 사이가 좋았어. 나와는 달리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아 전사대 후보생이 된 우수한 아이였는데도 업신여긴다거나 하는 일 없이 평범하게 대해줬던 것 같아. 훈련에서 낙오하거나 꼴찌라고 놀림당하고 울 때마다 베르톨트가 위로해주지 않았더라면 그 시기를 그렇게 넘기지 못했을지도 몰라. 그래서인지 그 애에게만은 이것저것…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어. 아버지에 대한 거라던가 전사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 같은. 그에 반해 그 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했어. 베르톨트는 또래에 비해 의젓한 편이었지만 나는 제 앞가림하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던 부진아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나 턱걸이로 전사 후보생이 된 일 따위의 이야기를 끝내고 전사 후보생으로 지낼 때의 일을 떠올리자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시기에는 추억이라고 부를 법한 일들이 많았다. 조금 밝아진 표정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베르톨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 또한 상담대상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베르톨트는 언제쯤 하기로 했어?"  
"어, 뭐를?"  
"상담 말이야. 베르톨트도 네가 맡는 건가?"  
"…글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정확한 날짜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정표를 확인해봐야 알 수 있겠는걸."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상담 일자야 베르톨트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파라디 섬에 도착하고 훈련병단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를 했을 즈음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나 저녁 무렵이 되어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내일 마저 해도 괜찮지?"  


아르민은 내내 뭔가를 적고 있던 노트를 덮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가비와 팔코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두었던 터라 라이너는 흔쾌히 수락하고는 서둘러 상담실을 나섰다.


집 문을 열자 미약한 날짐승 냄새와 비린내가 새어 나왔다. 베르톨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전부터 사격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종종 날짐승을 사냥해오곤 했다. 아이들을 식사에 초대했다는 말에 새라도 잡아 온 게 아닐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식탁 위에 새 두 마리가 놓여있었다.   


"아, 라이너. 왔어?"  


축 늘어진 새들을 양손에 들고 손질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는 사이 방에서 나온 베르톨트가 그를 맞았다. 방금 씻은 듯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에 물기부터 털어. 그러다가 감기 걸린다?"  
"아아.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양손에 들린 새들을 내려두고 수건을 찾아 베르톨트의 머리부터 말려주기 시작했다. 물기가 가실 때까지 문지르자 늘 단정하게 정돈되어있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부슬부슬해 보이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 괜히 장난기가 들었다. 그는 베르톨트가 손가락으로 빗으며 정돈하고 있는 머리칼 사이에 양손을 찔러넣고 이리저리 헤집었다.   


"으악, 라이너!"  
"하하! 이 스타일도 터프하고 좋은걸?"  
"장난치지 마!"  


정리하고 있던 머리가 다시 삐죽빼죽 엉망으로 헤집어진 베르톨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라이너의 손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피했다. 라이너는 그런 그를 집요하게 쫓아가, 이내 유쾌하게 웃으며 장난을 그만두었다.   


"장난은 이쯤하고 저녁 준비나 해볼까."  
"애들은 언제쯤 온다고 했지?"  
"7시 반. 한 시간 남았네."  
"빨리 요리부터 해야겠다."  


저녁 메뉴는 베르톨트가 잡아 온 새로 만든 새 구이와 스튜였다. 베르톨트가 채소를 다듬는 동안 그는 새를 손질했다. 깃털을 뽑고 피와 내장을 빼내고… 처음에는 손질을 잘못하는 바람에 식사 도중 깃털을 뱉어낸다든가 하는 일이 잦았지만 이곳에 정착한 뒤로 자주 손질을 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능숙해졌다. 스튜를 뭉근하게 끓이고 손질을 마친 고기를 곁들일 채소와 함께 오븐에 통째로 넣었을 무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너, 우리 왔어!"  


가비와 팔코였다. 부모님이 들려 보냈을 파이를 그에게 떠넘긴 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들이닥친 아이들을 간신히 달래 식탁에 앉히고 상을 차렸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식사는 시끌벅적하고 즐거웠다. 원체 말수가 적은 편인 베르톨트는 조용했지만 불편한 눈치는 아니었고 아이들 또한 그를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활발하게 굴었다.   


"이 고기 진짜 맛있네요!"  
"그러게? 닭은 아닌 것 같은데. 라이너, 이거 무슨 고기야?"  
"아, 그거? 정확히 무슨 종류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철새나 그런 게 아닐까? 베르톨트가 직접 잡아 온 거거든. 전사대 시절부터 사격 실력만큼은 베르톨트에 견줄 사람이 없었지."  


제 이야기도 아닌데 괜히 우쭐한 기분이 들어 자랑하듯이 떠벌리자 옆에 앉은 베르톨트가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렸다.  


"…아아, 그렇군요! 대단하세요!"  
"그, 그러게. 정말 멋지다…"  
"어이, 너무 쑥스러워하지 말라고. 사실이잖아?"  


만류하는 베르톨트의 등을 두드리며 북돋웠다. 베르톨트는 그래도 영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내오려고 했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늦었다며 일찍 자리를 떴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하고 다 먹은 식탁을 정리했다. 뒤늦게 베르톨트의 상담 일을 물으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언제쯤이냐고 묻자 베르톨트는 자신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나중에 다시 물어보겠다고 대답했다.   


"라이너 너는 내일도 상담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탄약이 다 떨어졌는데 가는 김에 탄약 좀 사다 줄래?"  
"벌써? 얼마 전에도 떨어져서 새로 사다 줬잖아. 어디에 그렇게 쓰는 거야? 너라면 별로 빗맞히지도 않을 거면서… 설마 실력이 녹슨 거야?"  
"으응… 사실 예전만은 못하더라고. 그래서 연습하려고 하다 보니…"  
"나 참, 요새 총 쏠 일이 뭐가 있다고… 뭐 알았어. 사 올게."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그 외의 몇 가지 잡다한 할 일들을 마치니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됐다.  


"잘 자, 라이너."  
"응. 너도, 베르톨트."  


잘 준비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워있자 씻고 나온 베르톨트가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그의 옆자리에 누웠다. 함께 살게 된 뒤로 신기하게도 베르톨트의 잠버릇이 감쪽같이 얌전해져서 한 침대를 써도 잠을 방해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라이너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옆자리에 누운 베르톨트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영 기분이 껄끄러웠다. 잠을 설치지 않고 금방 잠든 건 좋았으나 밤새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베르톨트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느적느적 걸어 상담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지만 소리가 작다 보니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제 1년밖에 안 남았어. 그동안만이라도 평온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나도, 걔도…"  
"네 마음은 알겠지만…"  
"알아. 어차피 내가 결정할 일도 아니고. 그냥, 나는 그렇다는 거야. …난 이만 갈게."  


문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뒤늦게 뒷걸음질을 쳤다. 다행히 문과 부딪히는 일은 피했지만, 문을 열고 나온 이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애니. 오랜만이네."  


안에서 아르민과 대화를 하고 있던 건 애니였다. 사는 곳이 달라 굳이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었던 탓에 애니와 만나는 건 퍽 오랜만이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화색을 하며 반가운 티를 내다가 애니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눈치를 살폈다.  
 

"…그래. 안녕."  
"많이 피곤한가 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냥… 별거 아닌 일이야."  
"그렇구나… 그, 그러고 보니 베르톨트가 보고 싶어 하던데. 한 번 들러."  
"…"  


머뭇머뭇 꺼낸 말에 애니의 안색이 한결 안 좋아졌다. 라이너는 아차 싶어 "뭐… 오기 싫으면 말고…" 하고 덧붙였다.  


"…아냐. 언제 한 번 갈게. 그러고 보니 너희 동네 뒤에 있는 숲에서 자주 총소리가 난다던데 뭐 아는 거 있어?"  
"아, 그거? 베르톨트일거야. 요새 사냥을 다니는데, 사격 실력이 녹슬었다고 연습한다고 했거든."  
"아… 그래."  


애니는 시원찮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손을 휘적휘적 저어 인사하며 자리를 떴다. 라이너는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애니가 나왔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라이너."  
"안녕. 방금 요 앞에서 애니 봤는데 기분 안 좋아 보이더라. 무슨 일 있었어?"  
"으음… 그냥 좀 다퉜어. 그래서 그럴 거야. 일단 앉아. 어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야지."  


훈련병단에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는 대부분 아르민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한결 빠르게 넘어갔다. 헌병단이 아닌 조사병단을 택한 이유라던가, 발각되었을 때의 일 따위를 기억을 더듬어가며 이야기했다. 벽 위에서 몇 달을 보내던 때에 이르러서는 할 이야기가 좀 더 많았다.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났다. 베르톨트와 사귀게 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그리고 파라디에서의 마지막 작전… 그에게도 아르민에게도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기에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얼버무리게 됐다.  


"그럼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넘어가고… 그러고 보니 그때 함께 돌아간 게 누구누구였더라?"  
"나랑 베르톨트, 지크 씨와 피크 씨였지."   
"아아, 그랬지. 맞아."  


그 뒤로도 할 만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기야 아르민에게는 그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울 테다. 그전에 하던 이야기들조차… 시간이 오래 지났기에 흘려넘길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라이너는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껄끄러운 내용들을 뭉텅이로 뛰어넘고 나자 어느새 땅울림이 일어나던 때의 차례가 왔다.  


"그때의 일이야 너도 아는 게 대부분일 거야.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간 나머지 뭔가를 느끼거나 할 새도 없었지. 다만, 그때… 그러니까 팔코가 구하러 오기 전에 잠깐 바보 같은 행동을 했었어. 늦었지만 그건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야. 그때 난… 포기하려고 했었거든. 베르톨트를 보고 그 애에게 죽임당할 생각을 했었어.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을 텐데도…"  
"…베르톨트에게?"  

"그래. 나는 베르톨트에게 큰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그 애에게 주어졌어야 할 기회들을 모조리 빼앗아 간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 돌아온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어. 그게 단지 시조 유미르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상담은 어김없이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말을 하다 보니 괜히 목이 타 전날과 마찬가지로 내어준 진한 커피를 마셨더니 아침부터 이어지던 두통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머리를 쪼갤 듯이 조여오는 통증을 참으며 간신히 집에 도착하자마자 속에 있는 것을 전부 게워내고 침대에 누웠다. 베르톨트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 보이지 않았다. 라이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모로 누워 일찍 잠을 청했다.


라이너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숲속에서 눈을 떴다. 엽총을 손에 쥔 채로 그는 하늘의 새들을 겨누고 있다. 분명 그 모습은 그 자신이 분명한데, 남을 보는 마냥 먼일처럼 느껴진다. 귀가 아플 정도로 총성이 연달아 울린다. 하지만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가져온 탄약을 모두 쓴 끝에야 겨우 새 두 마리가 떨어진다. 그는 그것들을 주워들고 허리춤에 맨다. 돌아갈 생각을 하며 총을 갈무리하는데, 멀리서 큰 고함소리가 들린다.  


"라이너어--!"  


자신을 부르는 처절한 외침이 현실감 없이 귓전을 때린다. 어느새 눈앞에 보이던 숲은 사라진 상태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무언가로 가려진 듯 시야가 어둡다. 매캐한 탄 내음, 흩날리는 모래와 돌가루,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피비린내. 몸이 붕 뜬 듯한 부유감 속에서 그는 지금 그를 부르는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생각해내려 애쓴다. 분명 알고 있는 목소리인데, 오랫동안 듣지 못한 것처럼 서먹하다. 하지만 그를 부르는 이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데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었다. 공포, 괴로움, 죄책감… 무참하고 참담한 감정이 그를 쥐어뜯는다.

 

관자놀이를 타고 뜨거운 액체가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이번에야말로 그에게로 가야 한다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그 열망을 정신없이 손에 쥐려 한다. 팔다리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온몸에 강대한 힘이 흘러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거인화를 할 때의 감각이다. 그는 이제 벽 위에 두 다리로 서 있다. 아래로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라이너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간다. 달리고 또 달린다. 하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라이너!"  


한참을 제자리를 맴도는 그에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돌아보지 않고 처음 들리던 목소리를 향해서만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몸을 억누르는 압력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우뚱 넘어지고 만다. 넘어지는 충격에 끔뻑끔뻑 눈을 여닫는다. 눈앞에 인영이 비쳤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머리가 둔중하게 아프다. 가위에 눌린 듯 온몸이 무겁다. 그는 흐릿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떠오르는 이름을 중얼거린다.  

 


'베르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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