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라이베르] 도돌이표

​베토리 @betorii16

우욱-

베르톨트의 입에서 꽃이 쏟아져 나왔다. 


“베르톨트-!” 깜짝 놀란 라이너가 휴지를 들고 달려왔다.


“만지지 마, 라이너!” 그렇게 외친 베르톨트는 본인도 놀랐는지 입을 막고 계속해서 토해져 나오는 꽃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밀어내는 손에도 어림없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꽃잎에, 베르톨트는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키 병


짝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흔하게 발병, 하지만 발병 시기와 짝사랑의 시작 시기가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토한 꽃을 만진 사람도 감염된다. 병을 치료하는 자세한 방법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지만, 병을 겪은 대부분의 사람은 짝사랑이 이루어지거나, 짝사랑을 포기했을 때 더는 꽃을 토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르톨트가 휴지로 대충 꽃을 정리할 동안, 라이너는 ‘꽃을 토하는 병’에 대해서 검색해보았다. 전 세계적으로 흔하게 발병하는 병이라니, 목숨에 지장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 방법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나저나 짝사랑이라니, 라이너가 가장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누구를? 베르톨트와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매번 붙어 다니는데 그가 좋아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 녀석이 남몰래 짝사랑을 하고 있었단 말이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시 멍해져 있던 라이너는, 베르톨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라이너, 오늘 본 건 비밀로 해줘..” 입가를 소매로 훑으며 시무룩하게 말하는 베르톨트에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근데 상대는 누구냐 베르톨트. 베르톨트는 곤란한 질문을 받을 때는 언제나 아랫입술을 꾹 물곤 했다, 지금처럼. …비밀이야
비밀이라는 말에 라이너는 이해하면서도 섭섭했다. 우리가 알아 온 시간이 얼만데 그것도 못 알려주나 싶었다. 하지만 곤란해 보이는 베르톨트를 더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꽃을 뱉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와는 다르게 베르톨트가 꽃을 토하는 일은 그리 잦지 않았다. 라이너는 처음에는 신기해하다가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베르톨트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끌어 티슈를 쥐여주곤 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어떡하냐- 하고 말하는 라이너가 베르톨트는 사실, 야속했다. 지금 누구 때문에 꽃을 토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무심하기만 하다. 이 꽃이 뭔지도 모를 라이너가 야속하다.


손 위에 올려진 호랑이 꽃 한 조각을 바라보며 베르톨트는 생각했다.

“나를 사랑해주세요”

베르톨트는 자신이 꽃을 토하는 경우가, 질투할 때라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라이너는 인기가 꽤 많았다. 자신과 함께 있다가도 다른 친구가 부르면 개구지게 웃으며 어이- 하고 인사하는 그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이 질투가 났다. 다행스럽게도 자신과 가장 오래 붙어있어, 꽃을 토하는 빈도는 낮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라이너는 주변의 여자아이들이 지나가면 베르톨트, 쟤냐? 이런 질문을 해댈 뿐이었다. 자신에게 친구 이상의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베르톨트는 이제 꽃을 토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와 있는 라이너를 보고 질투가 나 꽃을 토하는 순간에, 라이너는 휴지를 들고 후다닥 자신에게로 왔으니 말이다. 모순되게도, 라이너 때문에 꽃을 토하는 고통이 라이너를 잡아둘 수 있는 도구였다.

 

-


베르톨트, 그 꽃 토하는 거 말이지-


꽃을 처음 토한 날부터 꼬박 한 달이 지났을 때, 라이너는 운을 떼었다. 너무 오래된 거 아니야? 토할 때 안 아프면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불편하지 않나 싶어- 그렇게 말하는 라이너에 베르톨트는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이너?”
“그게, 그러니까.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네 마음을 알리는 건 어떨까”

아무 말이 없는 베르톨트를 바라보며 라이너는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라이너는 최근, 베르톨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우리는 남자와 남자지만, 베르톨트가 그쪽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르톨트는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다. 사실 라이너는 조금 두려웠다. 베르톨트라는 좋은 친구를 잃고 싶지도 않았으며, 지금의 꽤 인기 많고 잘난, 평범한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베르톨트를 떠보기로 하였다.


베르톨트가 뭐라고 대답할지 기다리는 그 시간이 길었다. 라이너는 마치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베르톨트?”


라이너는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톨트의 눈빛이 처음으로 무섭다고 느껴졌다. 살기가 느껴지는 시선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멍한 동공이 무서웠다. 


왜 그래, 베르톨트

“라이너, 이 병을 고치는 방법은 정확하지 않은 거 너도 알잖아.”
“으응, 그렇지”
“내가 그 애에게 고백한다고 해도 고쳐지지 않을 수도 있어.”


베르톨트의 말이 맞아 라이너는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반응은 어딘가 맹숭해서 라이너는 자기가 했던 의심이 터무니없었던 건가 생각했다. 뒤에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베르톨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짝사랑이 끝나갈 것을 알았다. 이루어지는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사랑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나쯤은 하고 싶었다.

“..라이너, 지금 좋아하는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도 이 병이 고쳐질까?”

라이너의 대답은 원래부터 들을 생각도 없었는지, 이렇게 물은 베르톨트는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그러니 라이너, 나를 도와줘.”

도와달라니? 어떤 의미의 도움을 말하는 건지 라이너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거절하기엔 눈앞의 베르톨트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라이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베르톨트는 입술을 붙여왔다. 라이너가 미처 몸을 빼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엉성한 베르톨트의 입술을 받아내며, 라이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베르톨트와 키스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 상황도 이상했지만, 그럼에도 별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자신이 더 이상했다.


뒤로 밀어내어 눕히는 베르톨트에게 반항 없이 몸을 움직였다. 둘 중 아무도 눈을 감지 않은 이 로맨스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 베르톨트는 허무함을 느꼈고, 라이너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이 또한 모순된 감정이었다.

둘의 입술이 떨어지고, 베르톨트는 마지막 꽃을 라이너의 얼굴에 토해냈다.

“이걸로 된 것 같아, 고마워 라이너.”


정말, 베르톨트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베르톨트가 꽃을 토하는 일은 없었다.


-


…라이너
…좋아해, 라이너

꿈에서 깨어난 라이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도 베르톨트는 없었다. “꿈이었구나.”
다만, 안도하던 라이너의 눈에 보이는 것은 베르톨트 대신, 정체 모를 허브잎들이었다.

로즈힙 “무의식의 아름다움”

bottom of page